보이지 않는 여자들

💬 이 책은 팩트집? 자료집? 이 따로 있을 정도이고 그 내용만 해도 어마어마하다. 젠더 데이터 공백이란 게 뭔지 그리고 그게 여자들의 삶을 어떤 방식으로, 소소한 수준이 아니라 정말 생사를 오가는 수준으로 다방면으로 위협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읽으면서 연신 충격받으며 책갈피를 백장쯤 걸어놨는데 멍청한 크레마 카르타가 혹은 알라딘 뷰어가 다 날려버려서.. 책을 처음부터 다시 훑었다^^ㅎ...


🔖 서론 : 남성이 디폴트

남성이 보편이기 때문에(그리고 여성은 특수이기 때문에), 투표권을 얻기 위한 영국 여자들의 투쟁을 그린 영화 <서프러제트>가 1차 세계대전을 다루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별나게 폐쇄적"이라며 비난당한다(그것도 심지어 <더 가디언>에서). 그리하여 유감스럽게도 1929년 <자기만의 방>에서 버지니아 울프의 고찰("비평가는 추측합니다. 이것은 전쟁을 다루니까 중요한 책이다. 이것은 응접실에 앉은 여자들의 감정을 다루니까 시시한 책이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함을 증명하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V.S. 나이폴은 제인 오스틴의 작품을 '편협하다'고 비판한다. 반면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가 걸프전을 언급하리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마찬가지로 노르웨이 작가 칼 오베 크네우스고르의 6권짜리 자서전 <나의 투쟁>이 <더 뉴요커>로부터 "보편적 고뇌"를 표현했다는 극찬을 받았다고 해서 그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해 쓰거나 여성작가 1명 이상의 말을 인용했으리라고 기대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다.

(...)

최근 들어 문화계의 끈질긴 남성 편향에 반기를 드는 시도가 몇 번 있었으나 대부분은 적대적 반응에 부딪혔다. 마블코믹스가 토르를 여자로 바꿨을 때 팬들은 들고일어났다. 기술지 <와이어드>가 지적한 것처럼, 토르를 개구리로 바꿨을 때는 찍소리도 없었던 사람들이 말이다. <스타워즈> 프랜차이즈에서 주인공이 여자인 영화 2편을 연속으로 내놓았더니 남성 우월주의 웹사이트들이 아우성으로 떠나갈 듯했다. 최장수 영국 드라마 중 하나인 <닥터 후>는 변신 능력이 있는 외계인이 주기적으로 몸을 바꾸는 SF 판타지 시리즈다. 이 외계인은 열두 번째 몸까지는 전부 남자였다가 2017년에 처음으로 여자로 변했다. 이에 대해 5대 닥터 피터 데이비슨은 닥터 역에 여자를 캐스팅하는 것이 과연 현명한 일인가에 "의구심"을 표했다. 그는 닥터가 남자인 편이 더 좋다면서 "소년들의 롤 모델이 사라지는 것"을 슬퍼했다. 화난 남자들은 트위터로 몰려가 드라마를 보이코시하자며 "PC충", "좌파"의 착한 척이라고 비난했다.

6대 닥터 콜린 베이커는 전임자와 생각이 달랐다. 소년들에게는 "이미 50년 동안 롤 모델이 있었다." 그는 자문했다. 애초에 꼭 롤 모델이 자신과 같은 젠더여야 하나? "롤 모델은 그냥 사람이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그렇진 않아요, 콜린. 왜냐하면 앞서 살펴봤듯 '사람'은 남성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여자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남자를 롤 모델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증거가 있지만 남자들은 여자를 롤 모델로 보지 않는다. 여자들은 남자가 작가거나 주인공인 책을 사지만 남자들은 여자가 작가거나 주인공인 책을 (적어도 여자들만큼은) 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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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인 세라 다이텀은 칼럼에서 이렇게 꾸짖었다. "이봐, 당신들은 파란 고슴도치, 인공두뇌학적으로 강화된 우주 해병, 빌어먹을 용 조련사로 플레이하는 건 마다하지 않았잖아. 그런데 내적 세계와 활달한 성격을 가진 주인공이 여자라는 건 상상을 초월하나 보지?" 다이텀의 말은 이론적으로는 옳다. 자신이 파란 고슴도치(*<소닉 더 헤지혹>)라고 상상하는 것보다는 여자라고 상상하는 것이 더 쉬워야 마땅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다이텀의 말은 틀렸다. 그 파란 고슴도치는 남자 유저들과 종의 차이까지도 뛰어넘는 특별히 중요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소닉이 수컷이라는 사실이다. 소닉은 분홍색이 아니고, 머리에 리본도 없으며, 바보같이 헤실거리지도 않는다. 평범하고, 젠더 표식이 없으며, 이례적인 개체가 아니다. 이 모든 증거가 소닉이 수컷임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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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이 보편이라는 추정은 젠더 데이터 공백의 직접적인 결과다. 백인이라는 점과 남자라는 점을 말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다른 정체성이 아예 언급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성 보편은 젠더 데이터 공백의 원인이기도 하다. 여자들이 보이지 않고 기억되지 않기 때문에, 남성 데이터가 우리 지식의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남성이 보편으로 보이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세계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이 소수자의 위치로 끌어내려진다. 이러한 설계를 통해 여자들은 문화에서, 역사에서, 데이터에서 잊어도 되는 존재, 무시해도 되는 존재, 없어도 되는 존재로 만들어진다.

<보이지 않는 여자들> 은 우리가 인류의 반에 대해 기록하지 않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젠더 데이터 공백이 그런대로 평범하게 사는 여자를 (도시계획에서, 정치에서, 직장에서) 어떻게 해치는지에 관한 폭로다. 또한 뭔가가 잘못됐을 때 - 여자가 아플 때, 홍수에 집이 떠내려갔을 때, 전쟁 때문에 피란을 가야 할 때 - 남성 데이터를 바탕으로 세워진 세상에 사는 여자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 직장

무급노동:

전세계적으로 여자는 무급 노동의 75%를 담당한다. 여자의 일일 무급 노동 시간이 3~6시간인 데 반해 남자는 평균 30분~2시간이다. 이 불균형은 일찍 시작되어 - 5살 여자아이조차도 남자 형제보다 집안일을 더 많이 한다 - 나이가 들수록 심해진다. 세계에서 남성의 무급 노동이 가장 긴 나라(덴마크)와 여성의 무급 노동이 가장 짧은 나라(노르웨이)를 비교해도 여전히 남자가 여자보다 짧다.

남녀 간 무급 노동의 불균형 문제를 끄집어 낼 때마다 나는 똑같은 말을 듣는다. "하지만 확실히 나아지고 있지 않나? 남자들이 점점 더 많이 하지 않나?" 개인 차원에서는 물론 전보다 많이 하는 남자들이 있다. 하지만 국가 차원에서는? 전혀 아니다. 남자의 무급 노동이 차지하는 비중은 꽤나 요지부동이다. 그리고 여자가 유급 노동에 참여하는 비율은 점점 증가하지만, 남자가 무급 노동에 참여하는 비율은 그만큼 증가하지 않고 있다. 단순히 여자들의 총 노동 시간만 증가했을 뿐이다. 지난 20년간 수많은 연구에 의하면 여자들은 그들이 벌어들이는 돈이 가계수입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상관 없이 대부분의 무급 노동을 한다.

능력주의 신화:

우리는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총명 편견을 가르친다. 최근 미국 연구에 따르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5살 때는 여자아이도 남자아이도 여자가 "정말 정말 똑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6살이 되면 달라진다. 여자아이는 여자라는 성별의 능력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사실은 너무 의심한 나머지 스스로에게 한계를 두기 시작한다. 어떤 게임이 "정말 정말 똑똑한 아이"를 위한 거라고 소개하면 5살 여자아이는 남자아이와 마찬가지로 그 게임을 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6살 여자아이는 갑자기 흥미를 잃는다. 학교가 여자아이들에게 총명은 여자의 것이 아니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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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노골적으로 여성혐오를 기록한 뒤 두 단락이 지나고 나서도 레비는 여전히 해커 문화가 왜 "남성만의 것"인지 설명하지 못한다. "슬픈 사실은 스타성을 가진 여자 해커가 1명도 없었다는 것"이라고 그는 적었다.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나도 몰라요, 스티브. 그러니까 우리 한 번 찍어보죠.

공공연하게 여성혐오적인 문화와 여성의 부재라는 수수께끼 사이의 명백한 연관성을 발견하지 못함으로써 레비는 '타고난 천재 해커는 무조건 남자'라는 신화 구축에 기여했다. (...) "뭔가를 하느라 밤을 새우는 것은 그 대상을 향한 사랑 외에도 외골수적인 면과 미성숙의 표시이기도 하다. 여학생들은 컴퓨터와 컴퓨터공학에 대한 사랑을 아마 굉장히 다르게 표현할 것이다. 당신이 찾는 집착적 행동은 전형적인 남자아이의 행동이다. 그런 행동을 하는 여자아이도 있을지 모르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전형적인 남성의 행동을 컴퓨터공학에 맞는 적성이라고 규정하는 것의 문제는, 여성의 사회화를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다는 점 - 여자아이는 남자아이처럼 반사회적 성향을 보이면 불이익을 당한다 - 그리고 코딩은 원래 여자의 일로 여겨졌다는 점이다. 사실 여자들은 원조 "컴퓨터", 즉 계산하는 사람이었다. 이들의 이름을 딴 기계가 나와서 여자들을 대체해버리기 전까지는 군을 위해 복잡한 수학 문제를 손으로 풀었다.

(기계) 컴퓨터가 등장하고 난 뒤에도 수십 년이 지나서야 여자는 남자로 대체되었다. 세계 최초의 전자식 컴퓨터 에니악이 1946년 공개되었을 때 프로그래밍을 했던 사람은 6명의 여자였다. 1940~50년대에 여자는 프로그래밍 분야에서 지배적 성별이었다. 1967년에 <코스모폴리탄>은 여자들에게 프로그래머가 되려고 독려하는 기사 "컴퓨터 걸스"를 실었다. 프로그래밍의 선구자 그레이스 호퍼는 말했다. "필요할 때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도록 미리 계획하고 스케줄을 짜 둬야 한다. 프로그래밍에는 인내심과 섬세함이 필요하다. 여자들은 프로그래밍의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이다."

그러나 사실 이 무렵부터 고용주들은 프로그래밍이 그들이 생각했던 미숙련 사무직이 아님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것은 타자나 문서 정리와는 달랐다. 고도의 문제해결력을 필요로 했다. 그런데 총명 편견은 객관적 현실 - 여자들은 이미 프로그래밍을 하고 있었으므로 당연히 그런 능력을 갖고 있었다 - 보다 강했으므로 업계 선두주자들은 남자들을 훈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겉으로는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성에게 불리하게 설계된 채용 도구를 개발했다. (...) 한편 "어떤 뉘앙스나 특정 상황에 맞는 문제해결력"을 요구하는 다지선다형 적성검사는 업계 선두주자들조차도 점점 더 프로그래밍과 상관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던 수학 퀴즈에 초점을 맞췄다. 이 검사는 당시 남자들이 학교에서 배웠을 가능성이 높은 수학 지식과 지원자의 인맥이 얼마나 좋은지를 테스트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이 검사의 답은 남학생 사교 클럽이나 엘크스회 같은 인맥을 통해 쉽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성격 프로필은 프로그래머의 전형 - 사회성과 위생 관념이 떨어지는 외톨이 오타쿠 - 을 만들었다. 널리 인용되는 1967년 심리학 논문은 "타인에 대한 무관심"과 "사람들 간의 긴밀한 상호작용을 포함하는 활동"에 대한 반감을 "프로그래머의 두드러지는 특징"으로 규정했다. 그 결과 기업들이 이런 사람을 찾아내서 프로그래머로 고용했고 이들이 당대 최고의 프로그래머가 되었으므로 성격 프로필은 자기충족적 예언이 되었다.

🔖 의료

이 중 어느 것도 놀랍지는 않다. 명백한 남녀 차이에도 불구하고 마취제와 화학요법제를 포함한 대다수의 약은 여전히 성 중립적 투여량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은 늘 과잉투여의 위험에 처해 있다. (...) 약은 숭천 년 동안 남체가 인류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가정하에 기능해왔다. 그 결과 여체에 관한 데이터에는 엄청나게 큰 역사적 공백이 생겼고 이 데이터 공백은 연구자들이 지금까지도 세포, 동물, 사람을 시험할 때 여성을 포함해야 한다는 윤리적 당위성을 계속 무시하기 때문에 커져가고 있다. 그것은 전 세계 신문 1면의 헤드라인을 장식해야 한다. 계속되는 여자들의 죽음, 의료계가 공범이다. 그들은 깨어나야 한다.

(...)

월경통도 마찬가지로 최대 90%의 여성이 겪는다. 미국 가정의협회에 따르면 생리통은 여성 5명 중 1명의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친다. 여자들이 매달 경험하는 통증의 정도는 "거의 심장마비만큼 심하다"고 묘사되어왔다. (...) 실데나필 시트르산염의 이중 블라인드 무작위 대조 시험의 결과는 - 여성 여러분, 놀랄지도 모르니 일단 자리에 앉아라 - "통증 완화가 연속 4시간 넘게 지속됐고 부작용은 관찰되지 않았다." 1989년 만들어진 실데나필 시트르산염은 비아그라의 성분명이다. (...) 이 연구의 임상시험은 연구비가 바닥나서 중단됐다. 즉 충분한 샘플을 모으지 못해서 주요 가설을 입증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연구진은 자신들의 발견을 확증하기 위해 "더 오랜 기간에 걸쳐, 가능하면 여러 장소에서, 더 대규모의 연구"를 하게 해줄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그것은 실현되지 않았다. 이 연구 팀의 리더인 리처드 레고르는 "연구규모와 기간을 늘리고 실데나필 시트르산염을 치료 기준인 비스테로이드성 소염제와 비교하기 위한" 연구비를 NIH에 두 번 신청했다. 그리고 거절 당했다. 두 번 다 "접수된 연구들 중 하위 50%에 속했던 것 같다." 심사 대상에조차 들지 못했다. 반려서를 보면 "심사자들이 월경통을 중요한 보건 문제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난다." 언젠가는 연구비를 받을 수 있을 것 같냐고 묻자 그는 "아니다. 남자들은 월경통에 관심도 없고 이해하지도 못한다. 내게 전원 여성인 심사단을 달라!"라고 답했다.

이쯤에서 왜 제약 회사들이 난입해 일확천금의 기회를 잡지 않는지 의아해보일 수 있으나 그 원인은 이번에도 데이터 공백일 가능성이 높다. 레그로는 나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제약업계는 비용 문제 때문에 "대개 연구자에게서 시작된 프로젝트에는 돈을 대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월경통에 관한 기존 연구가 거의 없기 때문에 이 약으로 얼마나 많은 돈을 벌 수 있을지 정확히 예측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임상시험 후원 결정을 내리기가 더 어려워진다. 특히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이 여자가 아닐 경우에는 말이다.

(...)

매일 전 세계에서 830명의 여성이 임신 및 출산으로 인한 합병증 때문에 사망한다. 일부 아프리카 국가에서는 에볼라바이러스가 한창 기승을 부릴 때보다 매년 출산으로 사망하는 여자가 더 많다. 그중 반 이상의 원인은 자궁수축 관련 문제다. 분만하는 데 필요한 만큼 자궁수축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이때 유일한 치료법은 옥시토신이라는 호르몬을 주사하는 것인데 효과가 있을 확률은 50% 정도다. 효과가 있으면 질을 통해 자연분만을 하고, 효과가 없으면 응급 제왕절개를 한다. (...) 현재로서는 누가 옥시토신에 반응하고 누가 반응하지 않을지 예측할 방법이 없다. 따라서 모든 임부가, 결국은 무의미하고 끔찍한 기다림 끝에 제왕절개를 하게 될 여자들까지, 똑같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

(...) 리버풀대학교 세포분자생리학과 교수 수전 레이는 최근 연구에서 자궁수축이 약한 임부들은 자궁근육층 혈액(자궁수축을 유발하는 부위의 혈액)의 산도가 높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말했다. 산도가 높을수록 제왕절개를 하게 될 확률이 높았다. 혈중 산도가 높은 임부에게는 옥시토신이 효과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이는 제왕절개 여부를 예측하는 데서 그치고 싶지 않았다. 제왕절개를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동료 학자 에이바 위버그이츨과 함께 자궁수축이 약한 임부들에게 무작위 대조 시험을 했다. 피해자 절반에게는 통상적인 옥시토신만 주사하고, 나머지 절반에게는 중탄산나트륨을 주사하고 1시간 뒤에 옥시토신을 주사했다. 차이는 엄청났다. 옥시토신만 투여한 임부는 67%가 자연분만을 했지만, 중탄산나트륨도 함께 투여한 임부는 84%가 자연분만을 했다. 중탄산나트륨 투여량은 체중이나 혈중 산도에 따라 조절하지 않았으며 투약은 단 1회로 그쳤다. 따라서 이런 부분을 조정하면 자연분만율은 더 올라갈 수도 있을 것이다.

이 획기적인 발견은 매년 수만 명의 임부가 불필요한 수술을 피하게 만드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국민보건서비스 또한 상당 비용을 절약할 수 있을 것이다). 제왕절개가 위험하거나 불가능한 나라에서는 여성들의 목숨을 구할 것이다. 게다가 제왕절개는 저소득국가에서만 위험한 것이 아니다. 미국에 사는 흑인 여성도 똑같이 위험하다. 미국은 선진국 가운데 산모 사망률이 가장 높은 나라지만 그중에서도 아프리카계 미국인 산모는 훨씬 더 위험하다. (...)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은 백인 여성보다 제왕절개를 받을 확률이 높고 2015년 연구에 따르면 (사회경제적 지위를 통제했는데도) 흑인 여성은 수술을 받고 한 달 안에 다시 병원으로 돌아올 확률이 백인 여성의 2배가 넘었다. 따라서 레이의 연구는 여기서도 획기적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노력의 결실을 가까운 시일 내에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레이가 영국 의학연구위원회에서 중저소득 국가에 혜택을 주는 연구를 후원한다는 소식을 듣고 신청했는데 자궁수축 부족이 얼마나 위험한지에 관한 데이터를 모두 제출했음에도 거절당했기 대문이다. 이 연구는 "우선순위가 높지 않다"는 말을 들었다. 따라서 현재 자궁수축이 약한 여자들을 위한 치료법은 하나밖에 없고 효과가 있을 확률은 반반이다. 이 현실과 심부전 치료제가 50여가지나 존재한다는 사실을 비교해보라고 레이는 말한다.

여자들이 의료계에서 외면당하고 있다는 증거는 압도적으로 많다. 세계 인구의 절반에 영향을 미치는 증상과 질병이 무시당하고, 불신당하고, 묵살된다. 이 모든 것은 데이터 공백과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증거에도 불구하고) 남자가 디폴트 인간이라는, 여전히 만연한 믿음이 결합된 결과다. 남자는 디폴트 인간이 아니다. 그들은, 당연한 얘기를 하자면, 그냥 남자일 뿐이다. 그리고 남자만을 대상으로 수집한 데이터는 여자에게 적용되지 않고, 적용할 수 없고, 적용해서는 안 된다.